문화적 쾌락의 알고리즘과 동아시아 이미지의 단절에 대하여
현대미술과 미학의 중요한 작동 방식 중 하나는 기존의 메타포, 알레고리, 서사, 이미지를 해체하거나 전복하고, 때로는 그것을 다시 끌어와 변형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창작자는 자신이 축적해온 문화적 지식과 이미지를 고유한 문법으로 재배열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미적 쾌락을 생성한다. 이 쾌락은 단지 작품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해석의 장에서 더욱 증폭된다.
학예사와 평론가는 작가가 무엇을 참조했고 무엇을 배제했는지를 밝혀내며 의미를 조직하고, 관객은 이를 다시 해석하며 논쟁에 참여한다. 이처럼 창작–해석–재해석의 순환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감각적·지적 즐거움, 이를 일종의 ‘문화적 쾌락의 알고리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알고리즘은 미술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체계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오늘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참조 체계는, 상당 부분 서구 중심의 문화 자본 위에 구축되어 있다. 예컨대 오이디푸스, 팜므파탈로서의 유디트, 혹은 이카루스의 신화를 떠올려보자.




피터르 브뢰헐의 작업에서부터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올리비에 랏시에 이르기까지, 이카루스라는 단일한 신화적 도상은 수세기에 걸쳐 반복, 변주되며 축적된 의미망을 형성해왔다. 이러한 반복은 곧 문화 자본의 두께가 되었고, 특정 이미지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통용되는 일종의 ‘국제어’로 자리 잡았다.
서구 미술은 이처럼 고대의 신화적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호출하고 변형하면서,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는 촘촘한 계보를 구축해왔다. 그 결과 오늘날의 작가들은 이미 충분히 축적된 상징 체계 위에서 미묘한 차이를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해석을 생산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형식, 컨텐츠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문화 자본의 결과다.
반면 동아시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형천, 과보, 제석, 당금애기와 같은 존재들을 떠올려보라. 이들에 대한 서사와 상징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이는 단순한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지 계보 자체가 단절되어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아무리 창작자가 동아시아 고전 이미지를 정교하게 차용하거나 비유적으로 사용하더라도, 그것을 해독할 공통의 기반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알레고리로 기능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시인 황지우가 『산경』에서 <산해경>의 이미지를 호출했을 때, 그것이 충분한 공명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단절의 배경에는 식민 경험, 급격한 근대화, 그리고 유교적 질서의 재편 과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왔다. 서구가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그리고 다양한 복고 운동을 통해 고대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활성화해온 것과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고전과 현대 사이의 연속성이 효과적으로 유지되지 못했다. 그 결과, 이미지의 축적이 아닌 단절이 반복되었고, 이는 곧 해석 체계의 빈곤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동아시아의 창작자는 이중의 곤경에 놓인다. 한편으로는 고전 이미지를 설명 없이 사용할 경우 그것은 거의 읽히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직접 설명할수록 작품은 과도하게 서술적이고 직설적인 형태로 기울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작품은 점점 더 크고, 빠르고, 강하게 전달되려 하며, 결과적으로 미묘한 긴장과 여백을 잃어버린다. 나아가 작가의 해설이 작품 자체를 앞서기 시작하면서, 미적 경험은 점차 텍스트로 대체된다. 이 답답함에 작품은 점점 설명적이고, 빠르고, 크고, 짙어진다.
이에 과도하게 설명적이고 교조적인 작품들은(흔히 민중미술이 비판받았던 지점과 비슷하게도) 점차 우악스럽고 저열한 분위기가 감돌게 된다. 그럴수록 동아시아 고전의 이미지를 빌리는 대부분의 동북아 작가들은 통념적으로 여겨지는 ‘모던’한 것에서 멀어진다. (모던은 이미 한참 지난 시절이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무리 애써본들 서구권이 그리 해왔던 것처럼 쿨하고, 고상하고, 우아하고, 은근하게 쾌락의 알고리즘을 작동시킬 수가 어려운 현실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적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사용할 경우 또 다른 함정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의 해석 체계에 이미 포섭된 상태에서 동양적 이미지를 층위화할수록, 그것은 자율적 기호 체계로 읽히기보다 이국적 장식으로 소비될 위험이 높아진다. 결국 창작자는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즉 이미 제1세계의 문화자본에 경도된 상황에서, 그 밖의 문법과 방법으로 구동될 수 있는 쾌락의 알고리즘 자체가 빈약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작가가 동북아 고전 이미지를 활용해 '스스로를 타자화할 뿐'이라는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작품 속 알레고리가 절로 관객에게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러기 위해선 제1 세계의 미술사가가 그러했듯 하나하나 쌓아 올려진 이미지를 뜯어 그것의 계보와 역사를 밝혀 해석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앞선 과정은 좋게 말하여 구조화이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계보에 따른 카르텔일 뿐이다. 서구의 이미지 소비 방식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지 십수년이 지난 지금, 굳이 그들의 방식을 본받을 필요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 지점에서 클라이브 벨의 ‘미학적 가설’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예술의 흐름을 따라 미적 경험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대신, 그들은 재빨리 몸을 추슬러 안일한 인간적 관심사에게로 다시 돌아서버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들이 작품에 부여해 주는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그들의 인생에는 아무런 새로운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며, 단지 옛것만을 계속 주무를 뿐이다’
- 클라이브 벨, 최기득 역, 현대회화의 원리, 미진사, 1995. 155쪽
패권으로 쌓아 올린 문화자본 위에서 부리는 고고한 가증은 마치 현재의 서구가 개도국의 낮은 환경 감수성을 비난하고 있는 꼴과 닮아있다. 동아시아의 고전 알레고리/메타포를 공부할 충분한 도판 이미지조차 구하기 어려운 동북아 창작자의 입장에서 ‘현대회화의 정의’를 가장한 그들의 비아냥은 충분히 모욕적이다. 그렇기에 결국 문제는 또다시 “어떤 이미지를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읽고 쓸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하는가”에 있다. 동아시아의 동시대미술은 지금, 그 조건 자체를 다시 만들어나가는 단계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는 특출난 몇명의 작가, 해설가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반복과 실패, 축적과 오독을 통해서만 비로소 새로운 계보는 형성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서구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도, 완전히 거부하는 것도 아닌, 그 밖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알고리즘을 만들어내는 것. 문화적 쾌락이 특정한 역사적 축적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또다른 작동 원리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것은 느리고 불완전할 것이며, 때로는 조악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과정 속에서만, 동아시아의 새로운 문화적 쾌락은 비로소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스스로에 묻는다. 우리는 왜 이카루스를 읽고, 형천은 읽지 못하는가? 여기를 둘러싼 수많은 이미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수 많은 한반도 신들은 모두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현대적 회화’의 실패로부터 시작되는 것들, 브리콜라주로서의 신화 혹은 계보 없는 이미지의 탄생.
한반도 리바이브, 리부트, 성 찾고, 본 찾고, 방울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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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5월 16일
박살강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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