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콜라주로서의 신화, 혹은 계보 없는 이미지의 탄생
C.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 구성이 잡다하며 광범위 하고, 그러면서도 한정된 재료로 스스로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무슨 과제가 주어지든 신화적 사고는 주어진 재료를 활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화적 사고는 일종의 지적인 브리콜라주인 셈이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안정남 역, 야생의 사고, 한길사, 1996.
그의 표현을 빌리면, 신화적 사고란 주어진 요소들을 그때그때 재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는 일종의 ‘지적인 브리콜라주’다. 이는 체계적으로 설계된 건축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파편들을 엮어 임시로 구조를 세우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나 이 임시성은 결코 미완성이나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갱신되는 사유의 유연성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동아시아 신화와 샤머니즘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신화적 전통은 교리나 경전, 혹은 고정된 제도적 장치에 의해 유지되어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원보다 이야기 속에, 규범보다 실천 속에 존재해왔다. 필요에 따라 수용되고, 상황에 따라 변형되며, 서로 다른 서사들이 뒤엉키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이를테면 <산해경>의 서왕모, <회남자>의 상아 신화, 서사무가 ‘제석본풀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단일한 계보를 따라 정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를 침범하고, 스며들고, 때로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재등장하며 느슨한 연결망을 형성한다.

이러한 관계는 흔히 말하는 ‘리좀적 구조’에 가깝다. 하나의 중심에서 가지를 뻗어 나가는 나무가 아니라, 어디서든 뿌리내리고 서로 얽히는 지하의 줄기처럼 작동한다. 신이 된 조상, 가족, 연인, 동료와 같은 존재들이 신화적 서사 속으로 끊임없이 유입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가로지르며, 고대의 기억을 호출하는 동시에 현재의 사건을 지시하고, 나아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생성한다. 신화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통해 계속해서 다시 쓰이는 구조인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형’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유효한 출발점이 아니다. 동아시아 신화와 이미지에서 특정한 기원을 추적하는 일은, 강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이미 수없이 갈라진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과 닮아 있다. 각 설화가 수십 종의 이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서사와 이미지가 끊임없이 변형되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일한 원형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사유를 협소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변형되는가’다.
순환의 방식으로 나아가기: 더 큰 궤도를 위하여
따라서 동아시아 신화와 이미지를 다루는 데 있어 핵심은 계보의 추적이 아니라, 지도 그리기다. 즉, 고정된 기원을 찾기보다, 서로 다른 이미지와 서사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때 ‘이미지’는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의미를 응축하고 전달하는 단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가 반복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화의 탐색은 곧 이미지의 탐색이며, 이는 다시 그것을 지지하는 세계관과 상징 체계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발생한다. 우리는 더 이상 A라는 원형 신화에서 B라는 변형이 파생된다는 식의 선형적 모델로 신화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상호작용하며 특정한 서사나 도상을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시 말해, A가 B를 낳는 것이 아니라, A와 B, 그리고 그 사이의 수많은 파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의미망을 구성한다. 이 구조는 고정된 중심 없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상황에 따라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탈중심적 구조는 동아시아 문화 창작물을 해석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동아시아의 알레고리는 이야기에서 이미지로 환원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반대로 이미지가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새로운 이야기를 생성하기도 한다. 즉, 사건이 이미지를 낳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사건을 호출하는 역방향의 서사 또한 가능하다. 이는 서구적 알레고리 구조가 종종 이야기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결국 동아시아의 신화적 사고는 ‘설명되는 구조’가 아니라 ‘작동하는 구조’에 가깝다. 그것은 완결된 체계로 존재하기보다, 매번 다른 맥락 속에서 다시 조립되는 임시적 장치이며, 바로 그 임시성 속에서 지속성을 획득한다. 브리콜라주란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동아시아 이미지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일한 기원을 중심으로 축적되는 두터운 계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흩어지고 다시 연결되는 얇지만 넓은 표면 위에서 작동한다. 만약 우리가 이 구조를 결핍이 아닌 다른 종류의 질서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동아시아의 신화적 사고는 더 이상 뒤늦은 전통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대적 사유를 위한 하나의 대안적 모델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
2024년 5월 16일
박살강 작성
'한반도정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반도 무속의 제도적 공백과 신빨의 행정화(1) (1) | 2026.05.09 |
|---|---|
| 한반도의 얼굴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 (2) | 2026.05.06 |
| 너를 부정하며 나는 인간이 되었다 (1) | 2026.05.05 |
| 동아시아 이미지는 어떻게 실패하였는가 (2) | 2026.05.04 |